Friday, August 28, 2015

“북한의 변화 원동력은 장마당과 대중문화”

UTS 북한사회동향 학술세미나서 학자들 견해 밝혀

“북한의 스탈린주의적 특성은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 그 원동력은 ‘장마당’으로 통칭되는 신흥경제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문화적 변화의 가속화이다”
지난 21일(금) 시드니공대(UTS) 코스모폴리탄 연구소가 주최한 북한사회동향 학술세미나에서 국내외 저명한 북한 전문 학자들은 “시장 경제의 급부상에 맞물린 사회·경제·문화적 요소가 북한의 변화를 적극 자극하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호주연구재단(Australian Research Council)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호주협의회(회장 이숙진)의 후원으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대학생들과 한국학 연구가, 민주평통 호주협의회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브런윈 달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세미나에서 학자들은 북한의 내재적 변화가 북한 김정은 체제의 붕괴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진단과 함께 내재적 변화의 속도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엇갈린 분석이 제시됐다. 
ABC TV가 ‘세계적 한국학 전문학자’로 소개한 안드레이 랭코브 교수(국민대)는 북한의 급진적 변화를 당연시한 반면, 레오니드 페트로브 교수(호주국립대)는 북한이 내부적으로 변화를 지속하고 있지만 서방세계가 원하는 수준의 정치적 변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랭코브 교수는 “북한의 비공식 ‘지하 문화’가 과거 참혹했던 기아 사태 이후 북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설적으로 보면 북한의 고립은 내부의 안정을 보존하는 유일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이런 점에서 북한 당국이 주민 통제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지만 동영상 혁명과 탈북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외부 정보, 기타 통신 수단의 발달로 북한의 변화는 가속도가 붙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발제에 나선 이화여대의 김석향 교수는 “최근 20년간 북한의 사회 경제가 급속한 변화를 거듭했다”며 “이러한 조류 속에 북한 여성들의 경제적 지위도 크게 변화했고 이는 북한 사회의 변화의 한 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최근 탈북 여성 130여명을 대상으로 심층 면담을 통해 북한 여성의 지위 변화에 대한 논문을 준비했다. 김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과거와는 달리 북한 가정에서 돈줄(money master) 역할을 하는 여성의 수가 급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며 “나름 지하 경제에서 여성의 활동 폭이 커지면서 북한 사회 변화의 한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시드니공대 정경자 교수는 북한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여성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연구 내용 일부를 소개했으며, 레오니드 페트로브 교수는 북한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대중 문화가 생겨나고 있지만 이를 북한 사회 전체의 변화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신중론을 펴기도 했다. 
허인권 기자 ikhur@hoj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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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22, 2013

"러시아에서 본 한국전쟁과 평화"

(레오니드 페트로프 호주국립대학교) 2013년 7월 27일 세계는 한반도에서의 전쟁행위들을 멈추게 했던 휴전협정 60주년을 기념했다. 한국에서의 휴전이라는 성격상 결론을 내리기 힘든 사건은 그것이 2차대전이 종식된지 불과 5년 만에 동북아시아의 심장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설명과 함께 서로 대비되는 관점으로 이르게 됐다.

두 개의 경쟁적인 정치체제-북쪽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남쪽의 대한민국- 사이에서 통일을 위한 충돌로 시작된 전쟁은 실은 일부 작가들에 의해 3차대전의 대리전으로도 묘사되었던 심각한 국제적인 분쟁이었다.

16개의 국가들은 본질적으로 이념간의 충돌이었던 이 전쟁에서 한 편이 된 한국을 지원하기 위해서 기꺼이 한국으로 몰려왔고 본질적으로 이념간의 대결이었던 이 전쟁에는 또 다른 편이 있었다. 미국, 중국 그리고 소련의 참전은 이 전쟁을 더 큰 냉전 대결의 촛점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유엔과 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마지못해 휴전에 서명해 놓은 것도 또 다른 방법을 통해 자기들 편 (그리고 그 대리인들)에 참가해 오로지 전쟁만을 계속하기 위한 견고한 의지로 반영되었다. 사상적으로 뚝 떨어진 두 개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모델-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사이에 있는 한국에서 평화가 회복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최고조에 달했던 공산권 붕괴 이후 20여년이 더 흘러갔다. 새로운 러시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냉전패배라는 힘들고 큰 충격적 경험을 통과하여 갔다. 신속했지만 불완전한 민주화와 경제적 고통 그리고 오일달러라는 횡재는 공산당과 KGB 관료주의자들의 크렘린으로의 복귀와 최근의 국가적 흐름을 대하는 태도에서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는 제국적 근성의 회복과 깊이 자리한 맹목적 애국주의와 군국주의는 자연스럽게 반서방적 정서의 회복과 냉전에 우호적인 수사(修辭)를 동반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도 있지만 일관된 것은 한국에서의 사무치는 전쟁에 대한 러시아의 공식적이고 대중적인 접근이다. 그들은 점점 더 모스크바, 베이징, 평양이 함께 외세 침략자에 대항해 싸웠다는 1950년대의 판에 박힌 문구를 상기시키고 있다.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불경스럽게 되어가고 있고 그와 동시에 민주적 제도의 중요성은 늘상 조롱당하고 있다. 2013년에 러시아 내각은 고교과정에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푸틴 대통령의 “역사의 해설은 만고불변적이고 공식적으로 승인되어야 한다”는 구상을 승인했다. 무엇이 러시아의 “공식적이고 승인된” 한국전 역사의 견해인가? 그것은 러시아와 해외의 독립된 학자들의 비공식적 견해와 얼마나 다를까? 이런 변화는 모스크바의 서울과 워싱턴과의 장기간에 걸친 관계에 갈등을 일으킬 것인가? 이것은 남북한 충돌에 있어서의 소련의 역할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것인가?

이 논문은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 ․ 역사학자들의 현재의 입장을 분석하였다. 일부 러시아의 한국학 전문가들은 매우 새로운 전망들을 하고 있고 한국문제에 있어서 비당파적 접근에 기초한 분별력있는 해법을 제안하고 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정치적, 반미적, 친북한적인 입장에서의 연구를 여전히 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주장은 묵은 원한을 악화시킬 수도 있고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그리고 “누가 한국전쟁에서 이겼는가?”와 같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을 제기함으로써 여전히 새로운 지역 외교적이고 학술적인 분쟁들에 불꽃을 튀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주제들은 러시아인들의 블로그 공간에서 열렬한 논쟁거리로 남아있고 역사 다시 쓰기 프로젝트로 소비에트 시대의 호전적 애국주의라는 약물의 주입을 통해서 “역사적 기술을 바로잡는” 과정에 기꺼이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신애국주의자들에 의해 쉽게 이용되고 있다.

이 연구는 호주 연구위원회가 후원하고 Tessa Morris-Suzuki(호주국립대) 교수가 선도하는 “동북아시아와 한국전쟁 : 당대의 지역구조 속에서 냉전과 열전의 유산” 이라는 연속된 합작 프로젝트의 일부분이다. 이 프로젝트는 한국의 이웃 국가들 : 중국, 일본, 극동 러시아, 대만, 그리고 몽고-을 통해서 전쟁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영향을 최초로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의 심오한 영향의 분석을 통하여, 이 프로젝트는 이 지역에서의 냉전의 이해를 더 심화시키고 한반도에서의 계속되는 위기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들을 위한 역사적인 구조를 제공할 것이다.

두 분야로 나뉘어진 이 논문은 처음으로 한국에서 여전히 평화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와 전쟁을 정식으로 끝내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당대의 러시아 학자들의 견해를 검토할 것이다. 해제된 비밀문서와 공표된 군의 인사적인 통계와 폐기되었거나 또는 생포된 적의 정보제공자들부터 얻은 보고들은 러시아와 서구의 사료들로 편찬되어 쭉 늘어놓게 될 것이며 그들 사이의 모순점들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두 번 째 분야는,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전쟁에 관한 새로운 러시아의 신화를 통해서 구 소련의 고정관념을 설계할 수도 있는, 겉으로 나타나는 대중적 견해로부터 발생하는 가능한 피해를 예고할 것이다. 러시아의 영화, 미디어와 도서관 자료들에 묘사된 한국전쟁은 이 충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또는 그렇지 않다면)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우리의 분별력을 증가시킬 것이다.

이 논문의 출처들은 한국에서 휴전 60주년을 기념하여 최근에 발행된 대중매체의 범위 내에서 선별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이것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러시아 노병들의 증언들과 회고 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다른 독립국가연합(CIS) 출신의 당대의 전문가들에 의한 분석작업이다. 새롭게 정형화되고 공식화된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현재의 논쟁 역시 러시아와 그 이웃나라들과의 국제관계를 위한 장래의 청구서의 모형을 만들기 위한 의도로 여기에서 이용된다. 이 자료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주류 러시아인들의 사고방식을 개조하기 위해 이용되어져 왔는데, 2000년 푸틴 행정부의 출범 이래로 거대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레오니드 페트로프 (호주국립대학교 초빙연구원)
https://www.facebook.com/events/197763273743613

Friday, August 30, 2013

김정은의 북한

 (글: Leonid Petrov / 번역: Liz Kim 김혜선)

북한에는 새로운 지도자 김정은의 시대가 열렸고 일년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은 유언장을 통해 자신의 후계자가 될  아들 김정은에게 남한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6자 회담을 재개하여 북한의 원자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전하였다. 후계자로서의 그의 의무만을  감안해 본다면, 작년 한 해동안 후계자 김정은은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실패한 후계자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발전되고 있는 북한의 최근 모습들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김정은은23.5백만 북한주민들에게 ‘다시한번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맬 것’을 당부하며 ‘번영의 시대’로 약속된  2012년 그의 시대를 열었다. 그것을 목표로 북한정부는 십만세대를 위한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였고 중국산 수입물품들로 상점들을 채웠으며 궤도에 위성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새로운 경제 조치로 외국과의 무역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주민들의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를 위하여서는 새롭게 여성«은하수» 그리고 «모란봉» 전자밴드들이 구성되었고 롤러 코스터가 있는 새로운 놀이동산과  돌고래수족관등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쇼 케이스인 평양을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짧기만한 신혼여행의 단꿈처럼, 번영의 시대를 향해 달려가던 혼동의 정책들은  북한정부의 도발적인 로켓발사의 원인으로 미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이의 식량원조협의와 정상화 합의가 방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무너져가는 사슬들로 그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남한을 비방하는 캠패인의 광기는 서울의 보수파들이 선거에서 성공하게 되자  그 강도가 높아졌고 몇 몇의 북한의 보수파 고위급관리들이 제거되기도 하였다. 

김정은 정권에 불만이 있던 몇몇의 고위급 장교들이 2012 년 11 월 김정은암살을 시도하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만일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자신의 정권을 지지하는 충성 강경파와 더 단단히 손을 잡아야만 했을 것이며 이러한 정치적 체스게임에서  ICBM 발사와 세 번째 핵 실험 등 북한의 최근 공격적인 행동으로 자신들의 우세함을 보여야만 했을 것이다.

잠재되어 있던 내부적 갈등에 관계없이, 북한은 장거리 로켓발사 장비의 개발과  3G 휴대 전화 네트워크, 그리고 빠르게 개선된 물리적 인프라를 갖춘 자체 핵 국가를 선포하며 2013 년을 시작하였다.

평양은 점차적으로 다국적 기업의 CEO 및 스포츠 유명 인사들의 메카로 전환되었다. 우라늄, 희토류 금속, 고급 석탄, 금등이 매장되어 있는 북한의 광산은 국내의 수요와 수출을 위한 다양한 천연자원을 자랑하며 매우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수만의 북한주민들은 비무장지대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개성공단에서 남한과의 공동 프로젝트로 하이테크와 소비재를 생산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013년 1월 22일 금지되었던 평화에 위협이 되는 북한의 로켓발사 재가동을 제지하기 위해 № 2087명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평양의 금지된 장난을 처벌하고 제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이징과 모스크바조차도 북한의 핵 및 로켓의 기술개발을 동결하라는 국제사회의 강도높은 요구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김정은은 2월 세번째로 핵 폭발을 명령하면서 국제사회의 요구에 맞대응 하였다. 그러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2013년 3월 7일 강도를 높인 № 2094 를 발표하였다. 또한 김정은은 1953 년 정전 협정을 파괴하는 전쟁선포를 미국과 남한에 선포하였다.

한미 공동군사 훈련인 Foal Eagle과 Key Resolve 그리고 Ulchi Freedom Guardian훈련은 악화로 치닷고 있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가져왔다. 북한의 로켓들은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기지가 있는 오키나와, 괌 그리고 하와이 뿐만 아니고 미국 본토까지도 조준되어 발사될 준비가 되었다. 평양에 있는 외국공관들은 4월 10일 이후에는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모든 북한 근로자들은 남북간 협력의 마지막 생존영역인 개성공단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국제적  긴장을 높여가고 있는 북한의 악명높은 이러한 행동들은 결국은 북한 내부의 현재의 위기들에 의거한 것 이기도하다.  지도자로서 아직은 너무 젊은 김정은은 굶주림의 계절인 봄을 극복하고 우상화된 김일성의 탄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무엇인가 특별한 일을 해야만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사나운 반미감정을 갖게 하여 경제로부터의 관심을 따돌리고 최고 사령관인 자신에게 주민들의 관심을 통합하려는 강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번영의 시대’에서 ‘적대적 제국주의의 태도’ 와 ‘임박한 전쟁’의 관점으로 북한의 주민들은 돌아서 있다. 후계자로서 실패한 자신의 실수와 보이지 않는 경쟁세력을 극복하려는게 그 목적이라면 전쟁의 긴장감으로 이미 충분히 그 목표는 달성되었다. 전쟁의 긴장감은 김정은을 너무 젊은 지도자에서 이제는 최고의 사령관으로 그의 입지를 충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정은으로의 정권계승은 북한 국가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게 하는 실질적인 변화를 피할 수 있다는 이론에 그 힘이 더 해지고 있다. 더욱이 만일 소련에서 일어났었던 정치, 경제개혁인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선언이나 글라 노스트가 북한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김정은의 리더쉽은 더 이상은 통제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세뇌를 통한 북한의 엘리트 집단들은 안정을 유지하려는 분위기를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줍잖은 경제개혁이나 정치적 변화의 압력만으로는 북한의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정권계승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로 이어져 왔다.  그 이론만으로 김정은은 김일성왕조를 후계받은 완벽한 후계자인 셈이다. 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군으로  구성된 조선 노동당의 친애하는 지도자이며 최고 사령관으로 숭배되고 있다. 일반인들의 사회 경제적 개선과 국가 안보에 거는 기대는 안정을 원하는 엘리트집단들을 위해 혁명이 없는 안정된 상태가 유지 될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대로라면 젊은 지도자 김정은은 최고 사령관으로서 숭배를 받으며 아주 오랫동안 그의 정권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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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ublished as "Domestic reasons behind the crisis" in SPI Dossier, Institute for International Political Studies, 9 April 2013. See the full text here...

Wednesday, August 21, 2013

NORTH KOREA: 북한 사람들 이야기

Proudly brought to you by the Australian Research Council, the Toyota Foundation, the North Korean Transnational Supporting Association, and the UTS Cosmopolitan Civil Societies Research Centre.

2013년 8월 27일 6시30분
장소: 시드니 한인회, 82 BRIGHTON AVE. CROYDON PARK, SYDNEY

호주를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북한 주민을 비롯한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보다는 주로  북핵문제를 비롯한 안보문제에 촛점이 제한되어 왔습니다. 북한 사람보다 북한을 더 잘 많이 알고 있다고 알려진 이화여대 북한학과 김석향 교수와 호주에서 북한연구를 하고 있는  연구자들을 모시고 전혀 변화하지 않을 것 같은 북한 사회에 일고 있는 변화에 대해서 들어보려고 합니다. 이번 행사는 북한 주민의 인권의식, 남녀 관계의 변화, 유행, 소비행태  등을 비롯하여 북한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촛점을 맞춰보았습니다. 보다 다각적인 시각에서 북한문제를 바라다보며, 북한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모색하기 위해서 기획된 행사입니다. 연구자들과  호주 교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북한사회와 북한이탈주민들에 대한 폭 넓은 문제의식과 관심의 공유를 기대해봅니다.

주최:  시드니 한인회 (02-9798-8800) / 재호북한이주민후원회  
후원: 정관장, 옹기김치 & 씨니건강  
강사: 김석향 교수(이화여대 북한학과) 
        레오니드 페드로브 박사 (호주국립대)
        정경자 박사 (UTS 사회학과) 

이번 행사는 호주한인회가 주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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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April 29, 2013

한반도에서의 전쟁과 평화


/ Dr. Leonid Petrov (호죽국립대학교) 번역/정리: 김혜선기자

해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봄은 남한과 북한사이의 긴장감과 함께 찾아온다. 분쟁해역지역에서의 군인들의 잦은 소규모 충돌과 비무장지대(DMZ)그리고 정규적인 군사훈련과 전쟁에 관한 엄포들은 가히 소설수준이다. 봄과 함께 시작되는 전쟁의 계절에서 올해,우리는 통제를 벗어나 남북한의 전면전으로 까지도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전례없던 한반도의 남북간 전쟁의 긴장을 목격하고 있다.

한반도의 통합을 위한 전쟁으로 1950년 6월에 발발하였던 한국전쟁은 미국을 선두로 하는 열 여섯개국가들의 UN연합군들과 북한과 중국의 연합군이 충돌하였던 국제 전쟁이었다. 기적적으로 그 전쟁은 핵무기를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세계 제3차대전까지는 확대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확고하지 않았던 불안정한 휴정협정의 결과로 화해할 수 없는 두개의 정권을 만들었다.서울과 평양,두 정권은 한반도의 선두 통합을 위한, 전쟁도 불사하지 않을 지속적인 힘겨루기를 계속해 오고 있다.

1970년대 초반까지 남한과 북한은 전쟁 후의 비교되지 못할 정도의 상반된 경제발전의 결과를 가져왔고 타협과 화해를 위한 정치적대화는 없었다.그러나 전쟁의 결과로 인해  북쪽과 남쪽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이산가족들의 만남이 국제적십자사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기도 했다. 1974년,북한은 평화통일을 위한 평화협정제안을 가지고 워싱턴에 접근해왔다. 그리고 남북한 평화통일을 위한 종합적인 계획으로 서울에도 접근하였다.그러나 서로다른 이데올로기사상과 상반된 경제력의 결과는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복원하고 냉전상태를 종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남한과 미국은DMZ남쪽의 서해와 동해의 해상에서 일년에 두번씩 군사합동훈련을 시작하였다.  이 훈련 기간동안 남한과 미군연합군은 가상 핵 공격에 대비한 새로운 무기와 새로운 전술등을 선보였다.북한은 주위공산국가들의 붕괴이후 자체적인 핵 미사일 프로그램을 개발했다.하지만 어떻든 이러한 서로다른 준비들은 계속되는 한반도에서의 딜레마를 해결하는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일의 기회는 서울과 평양이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영원한 적군으로서 다른한편의  붕괴만을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는것 처럼 보였다.

북한에 대한 남한의 햇볕 정책(1998년-2007년)이 실행되었던 시기조차에도 남북한사이의 불신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남한과 미국연합군의 육,해, 공을 톻한  전반적인 연례적 정규군사훈련이 계속되는 동안 북한은 핵 미사일개발과  무기고 구축을 계속해왔다. 그러한 결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미국동맹국들과 북한의 사이는 점점 더 부정적인 관계로 내딛게 되었다.  북한은 또한 호주를 포함한 미국동맹국들과의 관계 실패와 자신들의 악화된 경제상황의 결과들로 언제나 미국에 그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한반도의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상태는 이미 동북 아시아의 전략적으로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과 미국 그리고 김정은의  '전쟁의 상태 "선포는 냉전시대이래로 변함없이 동북아시아에 자리잡고 있는 한반도의 치료되지 못할 고질병에 대해 다시한번 세계를 상기시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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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드 페드로브는 호주국립대학교의 아시아 태평양대학의 한국학 초빙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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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was published in The Australian Financial Review (03/04/2013) under the title "Titanic struggle for unification keeps the two Koreas ap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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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1, 2012

북한의 숨겨진 비장의 카드…

(글/ Dr. Leonid Petrov;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정규적으로 북한을 여행해온 사람이라면 지난 몇 년 동안 의미심장하게 발전하고 있는 북한의 경제적인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관광객들은 새롭게 치솟고 있는 고층빌딩들, 도로를 달리고 있는 최신 모델의 신형차들, 개선된 인프라들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도대체 어디에서, 무슨 돈으로 그런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북한은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북한은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야심 찬 로켓과 핵프로그램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 만만치 않은 비용들은 북한의 경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있다. 계속되는 국제적인 무역제재는 북한의 무역과 투자전망을 물어뜯고 있고 북한의 경제전망은 어둡기만 했다.

게다가 계속된 홍수와 가뭄, 유행성 동물질병, 또 다른 자연재해들로 약해진 북한의 경제는 소생하기 힘든 것처럼 보였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이 주변 공산국가들의 붕괴와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던 1990년대 중반에 이미 사라졌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북한은 그러한 가혹한 시련들을 완전히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놀랍게 성장돼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까지도 하다.

북한은 곳곳에서 이런 미스터리 같은 희망의 모습들을 외국의 비평가들에게 보이고 있다. 2008년 차단된 남북간의 협력관계는 남한의 경제적인 지원까지 멈추게 했다. 외국의 인도주의 자선단체들의 지원조차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북한은 거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최소한의 무역으로 그나마 근근한 경제상태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평양은 국가 유지에 필요한 외화벌이를 위해 국제범죄와 마약밀매, 위조지폐 제작까지 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범죄의 증거가 없는 돈들은 북한의 외국계좌에 쌓여가고 있으며 은행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돈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사실 북한은 돈방석 위에 앉아 있다. 한반도의 북쪽지역을 이루고 있는 85퍼센트가 암반석 산맥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암반석에는 석탄, 철광석, 마그네사이트, 금광석, 아연광석, 구리광석, 석회석등 2백가지 이상의 다양한 미네랄들로 가득하다.

북한은 잠재적인, 거대한 광산국가

그 중 흑연이 가장 많이 매장돼 있다. 북한은 중국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마그네사이트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텅스텐이 매장돼 있다. 이런 자료들은 북한을 잠재적인, 거대한 광산국가라는 사실들을 입증하고 있다.

17가지 요소들로 돼있는 REMs (희귀한 지구금속)들은 지구의 지각층에서 발견됐다. 그 금속들은 풍력, 태양전지패널 하이테크 제품 제조, 하이브리드 자동차 등 녹색기술에 필수적인 것들이다. 소위 ‘첨단산업의 비타민’이라 불리는 REMs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 폰이나 노트북, 컴퓨터 LCD 제조에 꼭 필요한 미네랄이다. 세륨 및 네오디뮴과 같은 일부 드문 지구금속은 반도체, 자동차, 컴퓨터 및 기타 고급기술 분야에서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 탱크와 비행기, 미사일과 레이저를 만드는 데에도 사용된다.

남한은 북한의 광맥 가치를 6조불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도의 긴장된 남북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남한은 북한과의 협력으로 REMs 개발을 하려는데 그 관심의 수치를 높이고 있다.

2011년 통일부장관의 허가로 한국광물자원공사팀은 북한의 광맥을 탐사하기 위해 2번이나 북한을 방문했다. 또한 그들은 개성공단에서 REMs의 개발문제를 가지고 북한 국민경제연합회와 회담을 하기도 했다.

지구의 희귀요소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의 수출제한으로 그 가치가 점점 더 상승하고 있다. 지난 2월 중국은 1톤당 1백만불로 그것들을 수출했으며 그 가격은 전년도에 비해 9백퍼센트를 상승한 가격이었다. 

북한에겐 경제개혁도, 전쟁도, 평화적 통일도 무의미

북한은 그러한 REMs를 2천만톤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예상하고 있지만 그것을 발굴하거나 그것들을 이용해 첨단산업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9년 북한은 중국에 REMs를 1천 6백만불어치 수출했으며 그 수출량은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REMs의 가격과 수요 상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계승자에게 어떤 경제적인 개혁 없이도 북한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유리한 기회를 가져왔다. 미국과 걸프, 러시아 유가 성장의 바람잡이로 북한은 천연자원 판매를 통해 풍부하고 강력한 경제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중국, 일본과의 REMs의 대규모 탐사작전으로 인한 REMs의 수출은 북한의 국고를 보충 해줄 것이고 유엔의 독재적인 제재에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며 서민들의 소비성장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북한은 REMs 탐사를 위해 국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중국팀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이나 북한의 광물자원 탐구에 협력해오고 있다. 최근 서울은 북한의 광산산업과 기술혁신에 관심을 가지고 북한에 협력하기를 희망했다. 일본과 대만 역시 마이크로 프로세서 및 기타 최첨단 산업의 대안인 REMs의 탐사에 합류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풍부하고 풍요로운 국가 (강성대국)’의 약속은 곧 이뤄질 수 있다. 발전하고 있는 핵기술과 풍부한 천연자원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는 북한에게 고통스러운 경제개혁은 필요치 않다. 전쟁이나 평화적인 통일의 의미도 사라지고 있다. 머지않아 한반도의 두 나라들은 수준 높은 교류와 협력의 기회를 열고 수평의 관계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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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ly 26, 2012

김정은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다음은?

글/ Dr. Leonid Petrov (북한연구가•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북한의 권력계승은 완벽했다. 7개월 전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의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막내아들로 가는 권력계승의 길이 불안했을까 그는 막내아들 김정은을 위해 든든한 바람막이와 지침대로 서열 높은 계급에 완전한 그의 사람들을 임명했다. 어쨌든 권력계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계획대로 마쳐졌으며 바퀴는 잘 굴러가고 있다.

리용호 총참모장 제거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6개월 동안 운전석에 앉아 바퀴 굴리는 방법을 익혀왔다. 이제 그는 스스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완벽하게 북한이라는 자동차의 핸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충분히 자신의 성숙함도 믿는다. 혼자 힘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만큼 성숙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는 그의 군사적 멘토였던 리용호(북한 총참모장)와 충돌했다. 리용호 총참모장은 모든 걸 다 빼앗겼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국자이며 영원한 주석인 그의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 시대로부터 군부대 장성의 길을 걸어왔던 69세의 노련한 군 장성은 이렇게 제거되었다. 소식통들은 그의 사격 명령으로 20명~30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게 경질의 이유였다고 전했다.

왜 어린 지휘자는 그의 정신적 스승을 그렇게 불명예스러운 방법으로 제거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리용호를 제거하는 것은 그의 할아버지 대로부터 내려오는 오랜 전통의 끈을 자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조선로동당 제1비서,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의 순으로 서열의 계단을 오르던 김정은은 이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수가 됐다. 그는 이제 그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같은 영광스러운 서열의 자리에 올라 앉았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리용호 총참모장을 제거하기 일주일 전 문화공연을 관람했다. 문화공연 분위기는 지금까지의 공연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미지 메이킹 위해 노력 중

새로 선보인 ‘모란봉’ 음악밴드는 멤버들 모두가 여자들이었다. 짧은 스커트, 유행하는 커트머리스타일,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멤버들을 김정은 제1위원장이 직접 지명했다는 것이다. 월트디즈니의 미키와 미니 마우스, 서양 만화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마오 복장을 한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를 맞이하고 있었다.

또한 김정은 제1위원장은 문화공연장에 수수께끼의 여인을 동반했다. 한 때는 ‘보천보전자악단’의 솔로리스트였고 현재는 김정은 제1위원장의 아내가 된 리솔주였다.

세련된 서양 스타일의 옷차림과 헤어 스타일 그리고 공연을 관람하던 그녀의 자세들은 그녀 옆에 앉아있던 배불뚝이 북한 최고지도자보다 더 세상 일에 밝은 듯 한 냄새를 풍겼다.

현재의 김정은 제1위원장은 공공을 위한 이미지 메이킹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완벽한 지위, 군대의 최고지휘자가 된 그는 북한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아직은 성숙한 한 남자가 아닌 여전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막내아들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마오 복장과 짧은 머리, 그의 할아버지와 같은 외모들은 김정은 제1위원장을 완벽한 보수주의자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은 외국에서 유학했던 신세대답게 현대적이다.

역사 배신하고 개혁에 앞장서진 못할 터

그런 그의 어깨에는 많은 질문들이 올려져 있다. 할아버지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2천 3백만 그의 국민들을 배불리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평화와 전쟁, 그는 과연 무엇을 선호할까? 등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원수가 된 김정은 제1위원장 앞에는 할아버지, 아버지시대로부터 내려오던 많은 주민들과의 약속들이 이제는 시행 되기를 기다리며 놓여 있다.

남한과의 관계에서는 남한의 현 보수 정부에서 예전의 ‘햇볕정책’을 재개 해줄 온건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무런 기대도, 아무런 정책도 취할 수 없는 입장이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워싱턴 DC와 평양간의 대화는 재개되지 않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에 그렇게 큰 기대를 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경제개혁을 하지 못하고 정치개혁을 처녀 못 하는 김정은은 역사의 희생자로 보인다.

모든 개혁이 단번에 일어날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김정은 시대’의 조선중앙TV방송국에서는 월트디즈니의 미키와 미니 마우스들이 계속해서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이 개혁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북한의 65년 세월 안에는 너무도 많은 거짓들과 너무도 잔혹한 일들이 역사와 함께 남겨져 있다.

막내아들 김정은은 절대로 북한의 역사를 배신하고 개혁에 앞장서지 못할 것이다. 개혁은 김씨 왕조의 몰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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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ly 15, 2012

나의 1999년 북한 여행기: 발코니의 닭 그리고 욕조 속의 돼지…

(글/ Dr. Leonid Petrov 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

북한 주민들이 혹독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지어 아사하고 있다는 소문으로 북한의 경제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소문이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면 직접 북한을 여행하고 느껴보는 건 어떨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한 공산주의 정신’과 연결돼 있는 북한의 놀라운 현실을 여행하는 것만으로도 짧은 여행에 비싼 경비를 지출하는 것쯤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여행 스케줄 변경 불가능, 취소는 가능

여행을 준비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입국비자를 받기 위해 국제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역매니저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나는 단기 유럽 여행을 해야 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북한 최고지도자 생일에 참석하겠다는 내 고집스러운 결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 천 가지 이유를 대며 내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북한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그는 결국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내 북한 방문에 동의했다. ‘북한 방문 후 북한에 관해 좋지 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북한에서의 여행 동안 모든 계획들은 사전에 논의되고 승인 받는다. 그렇게 결정된 여행 스케줄의 변경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취소는 가능하다. 북한의 여행자들은 숙박 시설을 선택하는데 있어 선택의 폭이 무척 넓은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기와 더운 물이 나오지 않는 아주 싼 가격대의 호텔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시설을 다 갖춘 고급스러운 호텔에 아주 비싼 숙박비를 지불하고 머물러야 할 것인지 때로 그 선택은 고통스럽기까지도 하다.

후자를 선택한다면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한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호텔에 머물면서 호주에 있는 친척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있지만 1분의 통화요금은 엄청나게 비쌌다. 두 명의 통역 가이드는 언제나 나를 따라 다녔다. 내가 우울한 기분이 들어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어디든 상관없이 늘 나를 따라 다녔다.

외국에서 온 여행객들에게는 최고의 교통수단이 제공된다. 베이징과 평양간 초 고속 열차 안의 침대 칸, 테이블 위에 놓여진 미네랄 워터, 식당칸의 벽에 걸려있는 최고지도자 사진들은 나를 러시아 스탈린 시대 영화의 한 장면 속의 엑스트라처럼 느껴지게도 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박물관 매우 인상적

평양에 도착을 했을 때 연료 (굶주린 나라의 실제적인 보물과도 같은) 탱크를 가득 채운 벤츠와 볼보, 그리고 닛산의 신형차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 탈 수 있었다. 리무진을 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리무진이 동아시아 전체 중에서 가장 넓은 도로를 달리는 유일한 차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놀라지 않아야 한다.

오랫동안 강력한 북한의 주 에너지 공급원이 돼온 중국과 러시아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정복당하고 그들의 기름과 전력라인을 꺼버렸을 때 북한의 공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다.

모든 산업은 멈췄고 한 무리의 노동자들은 캔버라에서처럼 떼를 지어 자전거를 타고 출근 했다. ‘환경보호관점’에서 북한의 노동자정책은 감탄으로밖에는 묘사될 수 없었다.

평양을 방문한다면, 최고의 기억을 남기기 위해 화려하고 웅장한 김일성 박물관을 방문하는 특별한 기회를 꼭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김일성, 그리고 그의 아들 김정일 또 그의 아들 김정은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미래의 그 아들까지 북한의 혁명전통의 왕조를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이었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의 역사가 있는 승리의 애국전쟁기념관은 북한이 한국전쟁의 범인이며 악의 정체라는 것을 말해주듯 설계돼 있었다. 중앙역사박물관은 한국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진보돼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했다.

단군의 무덤은 특별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김일성은 북한의 연구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지침대로 한국의 신화가 됐던 최초의 왕의 골격을 출토했다. 5011년 전 한국인들의 조상인 단군의 유적은 과학적으로 입증됐다.

한가지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북한 주민들이 그들이 키우는 동물이나 애완동물을 대하는 태도였다. 생계의 어려움은 강제로 도심의 아파트에서도 가축 및 가금류를 키우도록 명령돼 있었다.

개는 고급 민속 레스토랑에서 요리되고…

농촌지역뿐만 아니고 도심에서도 염소와 닭 그리고 돼지는 가장 일반적으로 길러지는 동물이었다. 마을을 산책할 때에도 북한 주민들은 그들이 키우는 염소가 피곤하지 않도록 팔로 안고 다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고 염소는 담배를 먹고 도심의 주민들은 발코니에 많은 수의 닭들을 키우고 있었다.

일부 부유층의 사람들은 욕조에 돼지를 키우고 있었지만 평양을 방문했던 외국 관광객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귀여움을 받고 있는 개는 평양의 고급 민속 레스토랑에서 요리되고 있었다.

북한을 여행하는 동안 특별히 행복했던 시간이 두 번 있었다. 중국과 북한의 국경을 건너게 됐을 때 북한에 입국할 수 있도록 입국허가서를 받았던 일과 여행을 마치고 여권을 돌려받게 돼 안전하게 북한을 떠 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흥미로운 일은 흔히 ‘자본주의국가’로 불리는 서방국가로부터의 여행객들 중 호주에서의 여행객이 가장 많았다는 것이었다. 1975년 호주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97년에서 1998년까지 다섯 명의 북한 유학생들은 ANU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1999년 5월 북한으로부터의 공식방문자들이 캔버라를 방문했다. 국제적으로 링크된 외교관계를 개선하고 미래에 관한 몇 가지 인도적 원조를 구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태국에서 북한의 인사들은 호주의 동료들에게 공식적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간다면 그 언젠가 캔버라 거리에 북한으로부터 온 여행객들로 가득하게 될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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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this text in English here... "CHICKENS ON THE BALCONIES, PIGS IN THE BATH TU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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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28, 2012

모스크바는 김정은을 지지한다?

(글/ Dr. Leonid Petrov;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러시아는 에너지파이프와 전기 고압 전선망을 통해 분단된 한국을 연결하려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와 북한과의 경제관계는 오래 전 냉전시대의 그들 관계로 돌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948년 당시 소련의 스탈린은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립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북한 금고 고갈, 경제상태는 더 이상 나쁠 수가 없었다


그 이듬해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2퍼센트의 대출이자로 2억 1천 2백만 소련 루블을 거둬들이러 모스크바로 여행했다. 이 돈 중 일부는 북한의 중앙개혁경제를 구축하기 위해 할당됐지만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반도를 통합하기 위한 남한과의 전쟁비용으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후 소련은 북한의 도시와 산업 인프라를 재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심지어 중국과의 이념적 분할이 있는 동안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모스크바는 베이징과의 대결에서 평양을 측근에 두기 위해 노력했다.

극동 공산주의의 보루로 소련은 한반도에서 미군과 직접 대결을 했고 그러는 동안 북한은 중국과 소련, 양쪽의 주머니에서 돈을 짜내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 철의 장막은 무너졌고 모스크바의 민주화 영향은 서울을 인정했으며 평양에는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그 시점은 북한에 있어 경제적으로 최고로 악화된 상태였다. 돈은 비생산적인 분야, 즉 군대의 사상 캠페인과 김씨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사치스러운 기념물 등에 낭비되고 있었다.

북한의 금고는 고갈됐고 경제상태는 더 이상 나쁠 수가 없었다. 북한은 러시아에 부채상환으로 오이절임, 담배 및 인삼제품 등 가난한 수출상품의 목록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죽음과 1995년 자연재해의 시작으로 산업과 농업은 최악의 상태가 됐고 3년동안의 기아로 3백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1998년부터 2008년까지 남한의 ‘햇볕정책’과 기타 이웃나라들로부터의 인도적 원조는 북한을 ‘힘겨운 3월’에 겨우 살아 남도록 허용했다.

러시아, 북한 부채 90% 할인에 합의

북한의 그러한 ‘고난의 행군’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징후를 보이기도 했다. 이때 모스크바는 미화 80억불의 부채상환을 다시 요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번이나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방문했다. 다른 양자간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부채문제를 다른 문제들로 대처하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기도 했다.

작년 8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러시아 매드베대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남북한 모두에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도록 하는 제안에 합의했다. 동시에 북한과 러시아는 양국간의 경제협력을 위한 프로토콜을 체결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관점을 말해주는 옵저버들은 즉각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강한 의문을 갖게 됐다. 그들의 관측으로 그 프로젝트는 남북한을 계속적인 충돌관계에 남아 있게 만들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러시아는 10년동안 이웃국가에 천연자원인 석유를 판매해 수백억불의 오일 대박을 맞게 됐다. 미화 1백 10억불의 부채를 러시아에 상환하라는 요구를 경제적으로 메마른 북한에 기대한다는 것조차도 비현실적이다.

지난 주 러시아 정부는 고집스러운 동맹국인 북한에 부채의 90퍼센트를 할인 해 주는 것에 합의했다. 나머지 미화 11억불은 러시아와 북한의 교육, 의료 및 에너지 분야의 공동 프로젝트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아시아에 냉전 정책 돌이키려는 러시아


그러한 과정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마도 거래를 하는 타이밍과 다른 한 편의 아량에 놀랄 수도 있다. 번영의 새로운 시대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올해 북한은 오래된 악마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몇 십 년만의 가장 혹독한 추위와 가뭄은 농작물 수확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망가뜨려버렸다. 4월의 로켓 발사 실패는 당혹감과 함께 미국으로부터의 식품 원조 및 국제사회로부터의 강력한 비난까지를 가져다 줬다.

또한 화폐개혁 후 고조된 인플레이션과 지속적인 에너지 위기는 김씨 왕조의 세대교체가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에 동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실제로 이러한 위기에 있는 김정은 부위원장을 도와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일까?

올해 러시아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다시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그가 보수정치적으로 주변 독재 권력자들과 동맹관계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국제무대에서 점차로 친구들을 잃어가고 있다.

러시아는 동아시아에 과거 냉전스타일의 정책을 다시 돌이키려 하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목적으로 하는 러시아의 빈 약속들은 북한의 자생을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있다.

동북아는 다시 강력한 제국에 지배를 받게 되는 커다란 지리학적 게임 극장이 돼가고 있다. 이것은 7천 5백만 한국인들을 평화와 화해가 없는 불안한 상태로 남아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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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 the English version of this article here... Moscow Supports Kim Jong-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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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June 21, 2012

6.25전쟁 기념일에 돌아보는 한반도의 슬픈 역사

(글/ Dr. Leonid Petrov 시드니대 교수; 번역/정리: 김혜선 기자)

6월 25일은 한국전쟁 (1950-1953)이 시작됐던 슬픈 날로, 한국인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통일을 위한 냉전과 갈등은 제3차 세계대전의 기미까지도 보이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62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한과 북한 사이에 평화조약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한반도는 주변국들의 자국 방어 위한 key place?!

심지어는 다시 전쟁이 재개될 가능성까지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데 문제의 요점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가 들어있는 동아시아 지도를 보면 한국이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는 항상 주변의 대륙들과 북태평양 사이의 섬들에서 이민자들의 이동, 무역의 통로, 그리고 문화적 파도를 전파하는 다리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국은 고대의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문화적인 통로가 돼왔으며 13세기에는 동쪽으로 그 세력을 넓혀오던 몽고의 군사력 확장을 종결 짓게 한 장소가 됐다.

16세기에는 아시아를 향한 일본의 세력확장을 도왔던 스프링 보드 역할을 하게 됐고 그 후 19세기에는 궁극적으로 가장 뜨겁고 오래 지속되는 냉전의 프론티어가 됐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한반도 주변국가들의 정책결정자들과 전략자들은 한국을 잠재적인 적으로부터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중요한 지역적 가치가 있는 key place로 여겼다.

그러한 이유로 주변국들과의 힘든 관계는 한국의 숙명이 됐다. 심지어는 한반도에서 발생하는 사소한 정치적 사건들은 언제나 주변국들의 관심과 신속한 반응을 끌어왔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은 매우 풍부하고 극적인 정치역사를 가지고 있다. 중국 왕조는 그들의 제국에 한국을 포함시키려 했지만 현대적인 측면에서 보안조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했다. 대륙의 영향력을 일본열도에 확장하려면 먼저 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그리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샌드위치 

임진왜란 (1592년-1598년)은 아시아의 가장 큰 전쟁이었으며 국제적인 갈등과 미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최초의 한국전쟁’이었다. 전쟁은 중국을 정복하고 아시아를 지배하려는 야심 찬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무사 토요토미  히데요시에의해 시작됐고 불행히도 한국은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가장 빠른 통로가 됐다.

한국이 일본군의 통로를 거저 열어주지 않음으로써 히데요시는 한국을 약탈하고 괴롭히는 대상국으로 삼았다. 명나라는 한국과 손을 잡고 히데요시의 중국을 향한 행진을 차단했다. 명나라와 조선의 연합군대는 결국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밀어내기는 했지만 중국은 종종 한국에 그 보상을 요구해왔다.

계속되는 국내 개혁과 부진한 행정부는 제국주의의 국가들에게는 쉬운 목표물이 됐다. 청일전쟁(1894년-1895년)과 노일전쟁(1904년-1905년)을 시작하는 일본은 계속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전쟁들에서 일본은 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한국은 이미 중국에 세력을 확장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던 일본에 외교적으로 통제능력을 잃었다.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은 일본제국 확장을 위해 경제적, 군사적으로 필요한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일본, 북한 인정하고 경제무역제재 해제해야 

한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문화말살정책을 상대로 계속 투쟁했고 이후 35년동안 만주와 중국에서조차 일본군에 저항하는 투쟁은 계속됐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 소련과 미국은 준비가 돼있지 않던 한국을 두 임시영역으로 나눠 맡게 되었다. 그때는 냉전으로 알려진 새로운 글로벌 갈등이 이미 진행 중에 있었으며 임시로 나뉘어졌던 한국은 끝내 통합되지 못했다.

두적대국가 – 대한민국 (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는 그렇게 1948년에 세워졌다. 그 후 소련과 미국이 한국을 떠난 즉시 새로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됐다.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20개국의 연합군이 전쟁에 참여했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북한, 중국, 유엔군 사령부 대표들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적절한 평화조약조차 없이 적절치 못한 휴전협정조약이 체결됐다.

일본과 한국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확고한 동맹관계가 돼 미국과 강력하게 손을 잡고 있다. 1990년 초반, 공산주의의 공식적인 붕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경제원조와 안보보장으로 북한은 유지돼오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국과 외교와 무역관계를 설립했다.

이제는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인정하고 경제무역제재조치를 해제해야 할 시간이 됐다. 단단히 얽힌 동맹국의 낡은 시스템은 21세기를 다극화 세계로 만들고 한국을 영원한 분단상태로 가야 한다고 부추기고 있다. 한국이 그러한 동맹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단단히 얽혀있던 낡은 시스템을 털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평화와 안정의 시대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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